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안문 6.4 항쟁 (문단 편집) === 6월 4일 === 악몽의 밤이 지나가고 시위대는 대부분이 해산되었다. 광장에 남은 학생 시위대에게 정부 측에서 나온 지식인들이 협상을 하자며 다가왔다. 시위대에게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해산을 강권했고, 이후 시위 지도층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학생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들과 진압군 사이를 중재한 사람들은 대만계 가수 허우더젠,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류샤오보]] 등 '천안문 사군자'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이었는데, 이들 덕분에 천안문 광장에서는 '''그나마''' 평화롭게 시위대가 해산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해산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처음의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학생지도부 대표인 왕단,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류샤오보]] 역시 이 중 한 사람이었다.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 동남쪽에서 줄줄이 나오고 있었는데 탱크가 학생들을 뒤에서 덮쳤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날은 베이징 전체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 곳곳에는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가 다니지 않고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녔다. 날은 밝았고 창안제는 전부 진압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때까지도 저항하는 시민들은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광장과 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전소된 탱크와 장갑차, 차량들이 버려져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분노한 시위대가 죽인 진압군의 시체 여러 구가 그슬려지고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다리에 목을 매달아 전시해 놓은 것도 있었고, 불타버린 버스에 목이 매달려 음경 부위에 막대기를 꽂아넣은 시체도 있었다. 하지만 시체의 대부분은 탱크에 깔려죽거나 총에 맞아 죽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체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막론하고) 인민해방군이 증거인멸을 위해 비닐팩에 담아 모조리 수거해서 어디론가 운반해갔다. 도심 곳곳에서 시체들과 유류품을 태우는 연기로 가득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실종되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